Page 39 - 에코힐링 25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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치유의치유의 힐링 에세이힐링 에세이
겨울 숲의 “일어나….” 고 손전등 불빛은 왠지 더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. 걸음이 점점 더 더뎌졌고
남편이 나직이 나를 깨웠다. 시간은 새벽 4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. 우리는
급기야 멈추다시피 서서 각자의 주머니 속 핫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.
평온함 아무 말없이 내복과 방한복을 챙겨 입었다. 장갑을 끼면서 밖으로 나오자 그 때였다. 한순간이었다. 눈 깜짝 할 한순간, 하늘에 조명이 켜지자 땅과 나
세상은 까맣게 어두웠다. 손전등에 비친 자동차는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있 뭇가지와 바위, 낙엽더미 위에도 환한 조명이 켜졌다. 세상이 온통 우유를 쏟
글 김슬기 그림책 작가
는 것 같았다. 차 유리창의 눈만 대충 털어내고 서둘러 출발했다. 마침 제설 아놓은 것 같았다. 한치 앞이 안보여 두려웠던 이 곳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
<딸기 한 알> 저자
차가 지나간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았다. 가로등도 하나 없이 오직 우리 차 을 하고 있었다니! 세상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. 우리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
의 전조등만 의지한 채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한참동안 달렸다. 제설차의 흔 말했다. 어서 올라가보자고.
적이 뚝 끊긴 곳에 푯말이 있었다.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더 이상은 차가 올 입으로 내뱉은 공기가 바로 얼어버리는 날씨인데도 숨이 차오르고 몸에서 열
라 갈 수 없단다. 적당히 주차를 했다. 사실은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 기가 뿜어져 나오고 등줄기와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. 한 시간 여를 올라가
곳이 적당한 곳인지 알 길이 없었다. 등산화에 아이젠을 달고 차에서 내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. 굽이굽이 하얀 산세가 끝도 없이 겹쳐져 있고 그 위
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. 몸 속 깊은 곳까지 눈이 내린 느낌이었다. 지팡이 를 지나가는 구름은 하늘까지 펼쳐진 산 같았다. 나무 위에 앉아있던 눈이 바
로 눈을 푹푹 찍으며 한발 한발 내디뎠다. 너무 깜깜해서 손전등 불빛 너머 람 따라 날았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. 시끄럽게 일어나는 망상을 단박에
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. 우리가 걷는 방향이 맞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 잠재우는 장엄하고 눈부신 풍경이었다.
웠다. 무서웠다. 그림책의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떤 장면은 쓱 그려지기도 한다. 하지만 어떤 장
“다시 차로 돌아가서 기다릴까?” 면은 이 생각 저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나서 좀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엉
“그건 아니지, 여기까지 왜 왔는데….” 망이 되기도 한다. 이미 망친 그림을 살려 보겠다고 여기저기 계속 덧칠을 하다
그렇다. 우리가 이 새벽에, 이 눈 위에 있는 까닭은 어제 오후 뉴스의 날씨 보면 더 회생불가능이 되고 만다. 그럴 때면 과감하게 그림을 반으로 접어서 치
정보를 듣다가 비명처럼 외친 말 때문이다. 몇 일째 이어지고 있는 강원도 워버리고 찬물에 세수를 한다. 한참 뒤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하얀 새 도화지
산간 지역의 눈이 내일은 더 많은 양이 내릴 거라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를 보고 있으면 흰 눈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.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지
외쳤다. 난날을 살포시 덮어주는 눈. 그렇게 위로를 받고 나면 금세 눈 위에 첫 발자국을
“눈 보러 가자!” 낼 때와 같은 설렘에 잡념이 모두 사라지곤 한다.
“일출도 보자!” 누구든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에게는 눈 덮인 겨울의 아침 산을 권하고 싶다. 머
그 길로 바로 서울에서 강원도 태백 시내까지 달려왔다. 겨울산행을 하려면 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
든든하게 먹어 둬야 한다는 둥, 강원도에 왔으면 한우를 먹어야 한다는 둥 과 망설임 따위를 모두 얼려버릴 거라고, 그렇게 생각이 일시정지 된 채 하얗고
하면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함백산 방면 어딘가 허름한 숙소에서 눈을 붙였 평온한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마
고 코끝이 얼얼한 지금, 함백산 자락 어디쯤에 와있는 것이다. 돌아갈까 말 음속에서 퐁 퐁 퐁 솟아날 거라고 말해 줄 거다.
까 망설이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어쩐지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 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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